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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카 자유와 긍정의 철학 (이수영)

by 로그인시러 2016. 6. 14.





땅에서 넘어진자 땅을 짚고 일어나라고 했다.


이 책을 만나지 않고, 

아니 정확히 스피노자를 만나지 않고

어떻게 기독교 신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까?


기독교의 대립과 심판과 공포의 신을 어떻게 벗어 날 수 있을까?


오랜 시간 헤맸다.

니체를 만났음에도 

인문학적 신학이라는 교묘한 속임수에 

오랫동안 길을 잃고 헤맸다.


거참, 교묘하다.

선악저편에서 늙은 칸트를 조심하라던 니체의 충고는 정확했지만,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을 수 없고 벗어날 수 없었다.


그건 어린시절 부터 내 혈관에 뿌리 박힌

교리를 빼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중요한건 땅에서 넘어졌기에 

땅에서 일어나야만 한다.


교리에 메여있는자, 

교리로 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자가 바로 스피노자다.


책에서처럼, 

자고로 신이라고 불리려면 최소한 스피노자의 신은 통과해야 한다.

그 신은 최소한 스피노자 신의 본성을 가져야만 한다.


신이라면 최소 이정도 스펙은 되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이 책은 바로 위대한 긍정의 철학과 긍정의 신을 소개하는 책이다.


과거에 에티카를 읽어보려고 했지만, 

황당한 기하학적 추론때문에 당연히 책을 덮었다 ㅋ


그런데, 이 책은 스피노자의 이해를 가능하게 해주었다.

저자도 나와 같이 우선 처음으로 들뢰즈의 눈으로 보았다고 하는데....

아무튼, 내게 있어 이책은 금(gold)서와도 같은 책이다.


나는 지금 약간 혼란스럽긴 하다.

아마 무의식의 구조가 바뀌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전거를 타면서 보는 풍경이 모두 새롭다.

인간은 신없이 존재할 수 없지만, 신 역시 인간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나아가, 

나 없는 타자, 타자 없는 나 역시 불가능하다.

나의 온전함은 더불어 존재하는 것이리라.


스피노자를 만나지 않고, 

어떻게 이 실존의 깊고 고독한 허무를 이겨낼 수 있을까?


아직 책의 신 관련 부분을 넘기지 못하고 있다.


아직 충분히 체화 시키지 못한 탓이다.


책에서처럼, 

스피노자에게서 나는 만물의 구원을 보았다.


날 때부터, 알 수 없는 원죄를 타고 나서

죽을때까지 눈물로 참회하면서 성화시켜야 할 결핍되고 예속된 존재로서의 

인간의 구원이 아니란 말이다.


에티카를 읽은자,

만물을 비추는 밝은 태양을 

가슴에 품고 살 수 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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